1970년대 배우 윤여정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수 조영남과 1974년 결혼후 미국으로 가서 자녀를 둘이나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13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다 1987년 이혼했다.
배우 윤여정과 가수 조영남의 열애에서 결혼하고 이혼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배우 윤여정 가수 조영남 열애설
1971년
군생활 도중 당시 음악 다방이였던 쎄시봉을 들락거리며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사귀게 된다.
이백천 선생이 쓴 『이백천의 음악여행』이란 책자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등이
함께 조영남이 살던 마을 근처 수덕사 중턱까지 갔다 내려오던 길이었다.
계단이 좁아 한 사람씩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후미에서
일행을 따르던 내가 소리쳤다. ‘야! 우리 가까운 사람하고 손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앞서간 송창식은 이미 아래 평지로 내려와 서 있었다.
나는 곁에 있던 최영희와 손을 잡았고 조영남은 자연스레 윤여정과 손을 잡았다.
세 발짝이나 옮겼을까? ‘엄마’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윤잠깐’ 별칭
윤여정한테도 ‘윤잠깐’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곤 했다.
TV에 등장할 때 잠깐 나왔다가 금방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2. 배우 윤여정 가수 조영남 결혼생활
한창 잘 나가던 배우 윤여정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영남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1970년대 윤여정(20대)은 최고의 장희빈이라는 타이틀까지 있었던 당대 최고 스타였다.
젊은 사람들에게 윤여정은 그저 원로 배우지만, 젊을 때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실제로 조영남은 인기가 절정이던 배우를 지옥불로 떨어뜨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1974년 조영남과 결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추천으로 조영남은 결혼후 미국 플로리다의
트리니티 신학대학교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여의도 평화집회
말하자면 부흥회다. 1970년대 초는 막 '세계최대의 교회'를 건립했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포함해서 한국 대형교회들이 총집결해서 초대형 전도대회를
연이어 열었고, 1973년에는 100만 인파를 동원했던 최대의 흥행이었다.
현재 여의도공원 전체와 양쪽 도로까지 포함한 면적 전체가
당시엔 아무 것도 없는 광장이었는데, 거기가 가득 찼었다.
이걸 절대로 일반 집회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결혼생활
윤여정은 결혼생활 동안 굉장히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70, 80년대는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두부를 좋아하는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을 정도다.
(이 이야기는 조영남의 자서전에도 언급된다.)
조영남
“사실 사람들이 내가 아이 엄마(전처 윤여정)와 헤어질 때 쓴 노래인 줄 알지만
천만에 말씀, (아니다) 사이 좋을 때 만든 노래다 , 애들 낳기 전 (작사가인) 김수현과
(젼처인) 윤여정이 굉장히 친했다 어느 날 (김수현이) 낱장에 연필로
제목도 없이 써준 시, 시가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곡을 썼다.
지금도 믿기지 않아 근사한 멜로디를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결혼생활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데다가 , 사는동안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생활 동안 조영남은 바람끼가 다분했고, 돈을 한 푼도 안 벌었으며,
결국엔 윤여정이 모아둔 돈을 싸그리 다 탕진해버렸다.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윤여정
"쌀독에 쌀이 있던 때보다 떨어졌던 때가 더 많았다"
1987년 이혼
두 아들을 낳고 13년간의 알콩달콩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혼을 하게 된다.
조영남은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배우 윤여정과도 갈라서게 된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조영남(윤여정과 이혼하면서)
"네가 너무 못생겨서 같이 살 수가 없다."는 식의 막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영남 자신의 얼굴 꼴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윤여정은 젊을 때부터 외모를 검증받은 배우였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장희도 발랄하고
당찬 성격과 미모 덕에 모든 세시봉 멤버가 윤여정을 좋아했다고 털어놨다.
윤여정이 일일이 다 까발렸었다면, 조영남의 이미지는 회생불능이 되었을 것이다.
조영남
윤여정의 결벽증때문에 이혼했고, 돈을 왕창 뜯어갔다며 언플을 해댔다.
미국에서 신학대학교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 가수 조영남은 재기에 성공해서 돈을 엄청벌게 된다.
조영남과의 결혼생활은 윤여정 본인에게 기억하기도 싫은 트라우마이자 인생의 큰 상처라고 볼 수 있다.
조영남 본인이 시인한 일화만 해도 이미 충분히 인간 쓰레기로 단단히 찍힐 마당이다.
윤여정 이혼후 생활고
당시 38세였던 윤여정은 플로리다의 Publix 식료품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최저 임금 2.75달러를 받아, 두 아들을 부양할 생각을 했다면서 언어 장벽과 한국에서의
낙인의 무게 때문에 계산원으로 일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 윤여정은 배우 생활을 재개한 이후, 두 아들과 자신을 지키려고 온갖 작품에 뛰어든다.
오스카상 수상 소감에서도 "mommy works hard"라며 생계형 배우였음을 밝혔다.
이 시절의 일화를 알고 있는 중장년층이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인 조영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심지어는 인간 쓰레기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다.
젊은 층들이라고 해서도 조영남에 대한 불호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 그냥 관심없는 연예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어느 자리에서건 조영남을 험담하지 않아서 어마어마한 대인배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냥 조영남을 너무 싫어해서 언급도 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윤여정
이혼 후 절대 전남편 조영남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 하지 않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았는데, 이때 당신 엄청나게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윤여정은 한국에 귀국한 뒤 이혼을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13년을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이혼해 싱글맘이 된것이다.
윤여정(2005년 딴지일보 주최 김어준과 인터뷰)
조영남과의 결혼생활에 대해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한 인터뷰는가 유일한데,
이 때도 조영남의 본명을 말하지 않고 "걔"나 "C모 가수"로 불렀다.
(조영남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Cho Yeong Nam'이니까.)
'조영남과 만나 이혼하고 인생 망쳤다 부활했다' 라는 신문의 타이틀이 가장 불쾌했다고 한다.
조영남 (무릎팍도사)
"윤여정이 입을 열었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것."
3. 절친 작가 김수현
배우 윤여정과 김수현은 배우-작가 이기 이전에
매우매우 친한 절친이었다고 한다.
윤여정이 13년간 미국생활동안 위안을 받았던게 친구 김수현작가와
편지를 주고 받은 일이였다고 한다.
미국에 가는 것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말린 사람도 친구인 김수현이였다고 한다.
윤여정 배우로서의 복귀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김수현(윤여정이 당시 조영남이랑 이혼해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을때)
"절대 내 드라마는 하지마라 , 네가 내 드라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네가 내 덕
보는걸로 오해한다. 넌 충분히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배우로서 윤여정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친구인 김수현 작가라고 한다.
김수현 작가가 재능을 썩히지 말라며 용기를 주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출연하면 잘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함께 작품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게 된다.
윤여정은 라고 해서 다른작품을 찾았는데 이혼녀라는 타이틀 때문에 방송가에서는
거의 암묵적으로 캐스팅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윤여정은 진짜로 아무 작품에도 안써주자 결국 김수현 작가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고 한다.
김수현
"에휴, 나라도 너를 복귀시켜야지 어쩌겠냐" 이러면서 윤여정을 작품에 써줬다고 한다.
윤여정
“마흔여섯에 ‘사랑이 뭐길래’를 했다. 그전까지는 단역을 하면서 힘들었다,
배우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다시 가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잘 살고 있나 못살고 있나, 고민할 여력도 없었다,
그때가 제일 힘들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작가 김수현의 도움
이혼이 금기시 되던 시절에 조영남과의 이혼으로 생활고를 겪던 와중에
김수현의 도움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이혼녀를 메인 주인공
가족에 배역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방송사 윗분들 뿐만 아니라 촬영장에서 조차
김수현의 빽이 일부 작용한 것이라 윤여정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윤여정
"난 그 당시에 왕따였다 , 자신과의 약속도 칼 같이 지키는 양반이
나 때문에 그것을 깨뜨린 부분에 대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이후 배역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무사컴백하며 아카데이
제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을 하게된다.
윤여정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조영남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첫번째 결혼시절."
조영남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고 젊은 세대한테 조차 이미지가 안좋다.
윤여정 미국 플로리다 13년 생활
이때의 경험으로 윤식당과 같은 예능에서 외국인들과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아들은 독립 후 미국에 정착해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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