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독고성->배우 독고영재-> 배우 독고준
3대에 걸쳐 이어진 배우 가족에 대해 알아보러 가보자 슝~!
1. 독고성 프로필
본명 전원윤 (全原潤)
본관 정선 전씨
출생 1929년 4월 29일 강원도 강릉군
사망 2004년 4월 10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중앙의료원
가족
아들 독고영재
손자 독고준
2. 독고성 기본정보
1950년대~1960년대에 활동하던 영화배우이다.
독고영재(영화배우 아버지 독고성)
“당시 양호실에 가면 옥수수빵을 두 개 주었거든.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엄마 갖다 줬지.
하루는 윗집 사는 할머니가 수제비를 끓여주었어. 어른은 굶어도 애는 굶으면 안 된다고.
그런데 엄마는 그걸 건드리지 않고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나는 단칸방에서 꼬르륵거리고 누워 있는데 아버지가 오셔."
아버지 독고성
‘영재는 먹었어?’
어머니
‘네, 먹었어요.’
독고영재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 수제비를 드시더라고. 저거 나 먹으라고 준 건데 하면서
난 꼼짝 않고 누워 있었지. 하도 배가 고프면 잠도 안 와.
동틀 때 즈음 혼자 집을 나와서 무학동 산을 넘어가. 그때 우린 산 중턱에 살았는데
조금 올라가면 동굴 같은 게 나오거든. 거기 진흙을 막 파면 백토가 나와.
그 백토를 먹는 거야. 근데 그건 씹어도 씹히는 게 없어. 못살 때는 그런 거 먹고 자랐어.
산딸기나 깜부기 같은 열매도 따먹고.”
독고영재
“근데 어느 날 집에 갔는데, 사람들이 짐을 막 내고 있는 거야. ‘왜 그러세요?’
‘야, 너네 하산한다.’ 하산? 그땐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랐어.
우리 집이 저 아래 평평한 데로 이사를 간다는 거야. 무지 기뻤지.
아버지가 출연했던 1956년 데뷔 이후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영화로 대박이 난거야,
난 지금도 ‘하산한다’라는 말을 곧잘 써. 어디 있다가 이동하면, ‘야, 우리 하산하자!’
원래 내가 살던 곳은 왕십리 산 중턱에 있는 단칸방이었는데 아버지 영화가 대박이 난 이후
방이 여섯 개 딸린 한옥으로 이사했다, 문을 열면 문이 또 있고, 그 문을 열면 마당이 나왔다,
한마디로 인생 역전 그때부터 우리 집은 정말 잘살았어. 난 19세부터 미쓰비시 콜트를 끌고 다녔으니까.
아버지는 랜드로버를 타시고. 학교에 가면 차가 한 대도 없어. 딴 사람들은 차를 어디다 두는지 궁금했어.
1971년 새나라 택시가 나올까 말까 할 때니까 내가 너무 몰랐던 거야.
당시 친구들 밥값은 내가 다 냈어. 어느 날, 밥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두세 명만 오는 거야.
애들이 나한테 얻어먹기도 한두 번이지 미안해서 안 온다는 거야. 그때 처음 알았어.
어떤 친구는 차비 아끼려고 문래동에서 학교까지 걸어온대. 그때부터 난 차를 안 타고 다녔어.
밥 먹으러 가면, ‘야, 너 얼마 있냐? 100원? 200원? 나머지는 내가 낼게’
이런 식으로 친구들 부담을 덜어주었어.”
초등학교 시절 독고영재의 친구(운동화 에피소드)
어느 날 독고영재가 새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는데, 한 친구가 무척 부러워하자
독고영재
“아, 나 발 아파(신발을 벗더니) 너 나보다 발 작지?”
하면서 운동화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독고영재
“내 꿈은 외교관이나 민주 기자 같은 거였어. 난 3선 개헌 데모 세대야. 동대부고를 다녔는데
교문을 나서면 대학로 사거리에 서울대학교가 있었어. 대학생들이랑 휩쓸려서 데모했지.
교복 뒤집어 입고. 멀리서 보면 양복처럼 보이게. 한 여덟 번 정도 경찰서에 끌려갔어.
하루는 아버지 빽으로 풀려나서 집에 갔지. 당연히 맞을 준비 하고 팬티만 입고 2층으로 올라갔어.
맞을 때는 다 벗어야 해. 2층이 다다미방이었는데, 올라가자마자 비치파라솔대가 날아와서
퍽! 하고 바닥에 꽂혀. 파라솔대 끝에 쇠가 달려 있으니까 창이지. 그리고 아버지한테
머리만 빼고 다 맞는 거야. 그때 안티프라민이 처음 나올 때라 엄마가 그걸 발라줬어"
엄마
‘아이고, 우리 새끼 , 러닝셔츠라도 입어라’
독고영재
"몸이 움직이지도 않아 , 난 맷집이 좋아요. 웬만큼 맞아서는 끄떡도 안 해.
살려달라고 빌면 아버지도 그 핑계로 안 때릴 텐데 난 그대로 다 맞았어.
근데 재미있는 건, 맞으면서 기분이 좋다는 거야. 아버지가 나한테 일대일로 관심을 주니까.
아버진 대스타잖아. 작품을 580편 정도 하셨으니 집에 들어오실 시간도 없어. 이야기도 못해.
항상 엄마를 통해야 했어. 스케이트 하나 사달라고 했는데 한 1년 걸리더라고."
1955년, 영화 격퇴로 데뷔하였다.
탤런트 독고영재의 아버지. 역시 탤런트인 독고준은 손자로 3대가 연기자 집안이다.
최무룡, 이예춘, 박노식 등과 친분이 있었기에 아들도 그들의 아들들과 어릴때부터 어울렸고
나이가 가장 많았기에 이덕화와 함께 형님라인을 구축했다.
독고영재(아버지 독고성 악역 전문배우)
“아버지나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씨, 허준호의 아버지 허장강씨는 충무로를 누비던 악역 스타의 대명사셨죠.
그분들은 영화 속에서 잔인한 살인과 파렴치한 행각을 벌이는 연기를 했어요.
아들인 저도 독고성의 악역에 민망해했죠. 어쩌다 그분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시기라도 하면
처음엔 무서워 도망치기 바빴어요. 그러나 영화 밖에서 그분들 성격은 180도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상하고 부드러운 분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셨죠.
하지만 생활에는 무능력자셨어요. 배우는 화려하지만, 현실성이 모자라는 삶을 사니까요."
독고영재(아버지 독고성 악역 전문배우)
"언젠가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배우는 한때 화려하지만 불을 찾아 날아드는 나방과 같다. 평생 꿈만 꾸는 사람’이라고요.
아버지는 제가 배우 되는 걸 반대하셨지만 어쩌다 꿈을 꾸듯 지금의 제가 됐어요.”
독고영재
“아버지(독고성)가 배우셨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배우가 됐으니 피는 못 속이는 법이지만
저는 끼보다는 부단히 노력해 온 배우라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끼가 철철 넘치는 배우였다면
20년 가까이 무명의 세월을 버텨 낼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독고영재
“어린 시절,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다 , 애석하게도 아버지가 잘나가는 배우라는 사실이
우리 가족에게 남겨준 것이라곤 습관화된 기다림과 한없는 체념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촬영을 이유로 허구한 날 외박이었고 1년에 반 이상은 집을 비웠죠.
아버지는 많을 때는 15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기도 했어요.
집은 매일 영화 제작자들과 매니저들로 어수선했죠. "
독고영재
"아버지가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실패하는 과정도 지켜보았어요.
집안은 쑥대밭이 됐고 제 기타까지 압류딱지가 붙을 정도였어요.
그런 고통을 알기에 아버지는 제가 배우의 길을 걷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저는 연기자 대신 정치부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동랑 선생의 권유로 배우가 됐고,
기꺼이 20년간 무명의 길을 걸었어요.”
독고영재 (2세 배우들은 타고난 사람들)
“타고났죠. 그런데 타고나도 다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의 피를 물려받았어도
2세들 중 형제가 여럿인데도 배우는 1명밖에 안 돼요. 그것참 묘하죠?”
독고영재(아버지 독고성)
“사람들은 늘 아버지 연기를 잣대로 저를 바라봤어요. 제가 아무리 해도 (아버지를)
못 뛰어넘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게 됐죠. 영화계는 냉정합니다.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아버지 후광이라도 안 써요. 그걸 알기에 더 몸부림쳤죠. 그게 2세의 운명입니다.”
3. 성씨가 엄청나게 희귀한 예명 독고씨
독고영재의 아버지는 영화배우 독고성(악역 전문 배우)
악역이긴 했어도 의외로 인기가 많았고 굉장히 출연을 많이 하던 대스타였다.
지금으로 치면 마동석이나 정만식보다 인기나 출연 비중이 한단계 위일 정도의 수준.
즉 악역이자 주연. 아들 독고준까지 3대가 똑같이 예명을 독고 씨로 써서
성이 독고인 줄 아는 이들도 있지만 프로필에도 있듯 본명은 전씨다.
독고성
본래 정선 전씨인데, 아들 독고영재의 증언에 의하면 독고성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자 진짜로 독고씨인 줄 알고 독고씨 문중에서 문중행사에 초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독고성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행사에 참석해서 본명도 안 밝힌 채로 문중사람들하고
인사까지 했다고 한다. 사실 독고영재도 무명일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유명해지고는 문중행사를
가라고 독고성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고영재가 그것만은 남을 속이는 기분이라
못하겠다고 부친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는 상상플러스, 이경규의 그랑프리쇼 여러분 -
불량아빠클럽에서 본인이 직접 출연하여 증언한 내용이다.
예명을 독고씨로 쓴 이유는 해당 성씨가 엄청나게 희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성씨가 유명해지기 매우 좋은 성씨라서 예명으로 사용했다.
같은 이유로 이상무 역시 본인의 레귤러 주인공의 이름을 독고탁으로 정했다.
2004년 4월 1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중앙의료원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아버지 나오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울었다.
독고영재
“무명으로 한 20년 고생하다가 94년도 청룡상 조연남우상을 받았을 때
아버지가 ‘드디어 됐다’라고 하면서 우신 적이 있어요,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때
그 모습이 툭툭 생각나요, 문득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다, 한번은 꿈에 나타나셨는데 잠에서 깨서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크게 소리내서 운 적이 있다 , 꿈에 또 나오면 또 울겠지.
맛있는 거 사드리고 싶어. 효도가 딴 게 아니라 그때그때 맛있는 거 사드리는 거야.
제일 후회되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를 자주 같이 못 했다는 거.
굴비랑 북쪽에서 나오는 가자미식해라는 게 있어요. 이북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굴비는 아버지한테 한 두름에 600만원짜리까지 사드린 적 있어.
일본으로만 보내는 거라던데. 노인네들 겁먹을까 봐 60만원짜리라고 그랬지.
어렸을 적에는 자주 만나지 못해서 ‘아버지가 지게꾼이었으면 좋겠다’ 그랬는데.
두들겨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는데. 난 그냥 툭툭 털잖아.
아니면 그만이지 하면서. 근데 아버지는 그러지 못하셨어.
난 힘들어도 걱정을 별로 안 했는데, 아버지는 살면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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